이름에 그치는 세상을 원한다 | 민


   장혜영 님의 ‘당신에게 장애인 친구가 없는 이유’라는 세바시 강연을 보고, 그 18분 남짓 되는 짧은 강연에 배속을 돌려 작은 화면으로 들여다보면서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여기서 변명하고 싶은 점은 나는 평소에 슬픈 영화를 보고도 거의 우는 일이 없고, 남의 일에 잘 울지 못한다. 책을 정말 좋아하지만 책을 읽고 눈물을 흘리는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같은 책을 읽고 울었다는 사람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댓글을 살펴보니 나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분은 혼난 기분이 들어 눈물이 났다고 했다. 혼이 난 기분,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나의 생각도 장혜영 님이 꼬집는 그 점들과 다르지 않았으므로.

   장애는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개념이다. 이런 말은 이제 나에게 꽤 익숙하게 다가온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천천히 이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내 세계가 한 발짝 트인 그 감각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실제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규범과 분류는 인간들이 임의적으로 정의 내린 것이다. 내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 중 하나는 사람들은 정의 내리길 좋아하고,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기를 무의식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인간도 날카로울 정도로 정확하지 못하다. 이 세상에는 그 무엇도 자유 속에 속하지 않는 존재가 없지만, 사람들은 편의와 정확성을 위해 구분이라는 것을 짓는다. 편의, 그래, 편의. 잔인한 사람들은 지겨울 정도로 편의를 따진다. 그것이 임의적이든 아니든 어떠한 기준을 만들고, 그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을 분류하면 우리는 생각하기에 편리해진다. 모든 것의 성질은 그 기준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보다 더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구별하는 단어’를 듣자마자 ‘대표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여성과 남성, 미성년자와 성인, 동양인과 서양인,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물론 내가 나열한 이 모든 단어, 그리고 개념이 세상에 불필요한 구분이라는 것은 아니다. 각각 대응하는 두 개념들에는 분명히 다른 점이 존재하며, 우린 그들을 부를 말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혀 설득력 없는 이유로 이러한 단어들이 생겨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명칭들이 단순히 ‘명칭’에서 그치는 세상이 도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람들을 그저 ‘한 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말들에 의해 구속되고 있지 않은가. 여성과 남성의 차이,라고 한다면 ‘염색체’라고 가장 정확하게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주위에서,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정신적인 것(혹은 그것에서 비롯된 겉모습)’에 대한 답을 내어오는 사람들을 보기 드물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스테레오타입이라고 부른다.

   명칭은 실제로 그저 명칭에서 그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구속력을 가진다. 이것은 곧 장애는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 된다. 우리 사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별하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배척하기 때문에, 장애라는 개념과 명칭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재생산된다. 장애란 무엇인가? ‘보편적인 세상’에서 장애는 왜 배제되는가? 현재 자신이 장애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혹은 조금 물러나 몇 년 뒤에라도 당신이 비장애인에서 장애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당신은 장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살아가면서 들었던 장애에 대한 말 중 두 번째로 나에게 와닿았던 말이 있다. 비장애인들은 언제나 잠재적 장애인이다. 우리는 모두 장애를 갖게 될 수 있다. 그것이 언제라도. 당장 몇 시간 뒤에라도, 몇 달, 몇 년 뒤에라도. 당신이 언제나 “정상”의 범주에 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나, 가령 당신이 그렇게 확신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아쉽지만 그럴 수 없다. 당신은 숨 쉬듯 나와는 다른 존재를 배제하는 위치에 있다가도 언제든 배제당할 수 있다. 당신이 견고히 해놓은 정상 범주의 밖으로 쫓겨날 수 있다는 말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같이 살아가야 한다. ‘부류’를 나눌수록 견고해지는 것은 뜻밖에도 편의나 갈등의 완화가 아닌 몰이해와 배제심뿐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생활공간을 분리하는 것은 본인의 입맛대로 같이 지낼 사람을 선택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더욱 다양한 사람들과 섞여지내며 세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결국 ‘명칭은 명칭일 뿐’인 세상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생각을 꼬집거나 혼내는 듯한 말을 하기에는 나도 너무나 개인적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실제로 그렇다. 이렇게 모든 글에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개입시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 오직 내 이야기만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 그만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하지만 항상 개인적인 생각과 마음으로도 나는 세상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또한 이렇게 본인밖에 모르는 사람도 세상이 바뀌기를 원하고, 그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많은 개인적인 사람들은 더욱 같이 살아가야 한다.

   나의 말과 마음이 누군가에게 전혀 와닿지 않거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진심을 알 수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만큼 우리는 다르다. 누군가에겐 내가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지, 내가 어떤 부류에 속하거나 속하지 못해서라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또한 나는 여전히 사회에 섞여 여러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다. 자, 이제 이만하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해가 됐을까. 우리는 모두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서로 배제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일 뿐이다.


민 |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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